[내일신문]
6개월 말린 산대나무에 인두 달궈 한글자씩
한상봉 장인 "문무 어우러진 우리만의 문화"
타닥타닥. 황토 화로 안에서 숯이 타들어간다. 뭉툭한 호미처럼 보이는 인두 끝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붉은 기운이 허리께까지 올라온다. 장인은 인두를 쥐고는 손과 발로 고정시킨 대나무 위로 힘주어 움직인다. 몇차례 손놀림 뒤에는 대나무에 화상자국처럼 글자가 새겨진다. 그렇게 두어번. 인두는 어느새 다시 검은빛이 된다. 작품 하나를 완성하려면 이 과정을 통상 150~300번, 많게는 500번까지 되풀이해야 한다.
"온 몸으로 쓴다고 해야겠죠. 글자가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뭉개지면 망친 작업이에요."
중요문화재 60호 낙죽장도. 한상봉(53) 전수교육 조교는 무형문화재 보유자였다가 지금은 명예보유자로 한걸음 물러선 아버지 한병문(75)씨 뒤를 이어 낙죽장도를 만들고 있다.
누르스름한 대나무 통은 화사하고도 소박하다. 온 몸에 새겨진 매화며 용이며 한시나 고문(古文)은 눈길을 사로잡지만 투박한 마디마디가 그대로 살아있는 대나무 본연의 기운도 그대로다. 가운데 토막 부분을 엄지로 스윽 밀어내니 대나무집 안에 몸을 숨기고 있던 칼날이 모습을 드러낸다. 쇠를 두드리고 갈아서 만들었지만 칼등에 새겨진 북두칠성과 일편심(一片心) 글귀 덕분인지 차갑지는 않다.
낙죽장도(烙竹粧刀). 손잡이와 집이 대나무로 돼있는 칼이다. 대나무만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고 더 공을 들여 표면에 시나 문장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어린아이 손바닥만한 것부터 지팡이칼까지 길이도 모양도 다양하다. 장인은 "삼국시대부터 만들었다는데 언제부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는지는 모른다"며 "손재주가 있는 선비들이 만들어왔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낙죽장도는 선비들 기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와 세한삼우를 품고 있다. 대나무에 매화 그림을 그리고 마무리 장식으로 국화 모양 자개와 난초를 의미하는 녹색 사슴가죽 끈을 매다니 사군자가 되고 칼날 안쪽에 들어가는 소나무를 따지면 세한삼우가 된다.
꼼꼼한 손길로 새기는 글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포함된 황주죽루기(黃州竹樓記)나 양죽기(養竹記) 어부사(漁父辭)가 대부분이다. 손잡이와 칼집에 300~600자, 많게는 1000자까지 새긴다. 옛날 대나무책을 사용했던 때로 치자면 책 1권 분량이다.
낙죽장도와 한씨 부자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부친 한병문씨가 어려운 집안 살림 때문에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할아버지의 사촌 집에 들어가게 된 것이 계기였다. 당시 재종조는 형편이 비슷한 가정의 아이들을 모아 한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손재주가 뛰어난 선비셨어요. 거문고며 북을 직접 만들어 연주할 정도였답니다. 처가가 있던 마을의 서당 훈장님이 낙죽장도를 만드는 걸 보고는 할아버지 집 옆으로 모셔와 기술을 전수받으셨죠."
할아버지는 그 기술을 한병문씨에게 물려주었다. 아들 손자, 함께 글을 배웠던 동문들 중 누구도 낙죽장도와는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한씨는 "손재주를 보고 선택하지 않으셨을까 추측만 할 뿐"이라고 말했다.
일을 도우며 어깨 너머로 전수받은 기술은 8년 뒤 할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다시 묻힐 뻔했다. 돈벌이가 되는 일도, 낙죽장도를 즐겨 찾는 이도 없었기에 부친은 생업인 농사로 돌아왔다. 그러다 마흔이 넘은 어느날 일본에서 오랜만에 고국을 찾은 옛 동문에게서 낙죽장도 소식을 들었다.
"일본의 한 박물관에서 세계 명검 전시회가 열렸는데 한국 칼은 꼭 한점 있더래요. 같은 스승에게 배운지라 할아버지가 만든 낙죽장도라는 걸 알아본 거죠. 아버지는 '잘못하면 맥이 끊기겠구나' 싶으셨대요. 그때부터 공예대전 출품도 하고 서울 헌책방을 뒤지면서 자료도 찾고 바지런히 움직이셨죠."
한병문씨는 1993년 중요 무형문화재 60호 보유자인 장도장(粧刀匠)으로 지정됐다.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재료 다듬는 일을 거들며 낙죽장도를 생활로 받아들였다. 1995년 전수장학생으로 등록했고 2004년 조교가 되면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맏아들이 뒤를 잇는다며 좋아하던 아버지는 그해 쓰러진 뒤 최근 다시 건강이 악화돼 보유자 자리를 내놨다. 앞으로 낙죽장도는 한상봉씨가 주로 생산하게 된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맏아들에게 자잘한 심부름을 부탁하며 슬그머니 기술을 전하는 중이다.
"재료 구하기가 힘들어요. 마디가 촘촘하고 강한 자생 대나무는 산 속에서나 찾을 수 있거든요. 그것도 마디가 예쁘고 일곱마디 이상 쓸 수 있어야 해요. 겨울을 나기 위해 수액을 버린 대나무를 찾기 위해 겨울에만 채취하죠."
대나무를 다듬어 6개월간 햇빛에 말리면서 탈색한다. 그리고 5~6년은 그늘에 말리면서 쪼개지거나 휘어지는 걸 골라낸다. 준비된 대나무에 글씨와 그림을 새기는데 한두달. 칼날 작업에 3~4일. 두차례 사골국물을 우려내 기름기를 적절히 제거한 소 다리뼈와 고목에서만 나오는 먹감나무, 100년을 간다는 민어풀 등 다른 재료준비는 상대적으로 쉽다. 대나무 채취부터 따지면 짧게는 6년에서 길게는 10년을 기다려야 낙죽장도 한점이 탄생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씨나 그림이 있고 없고에 따라 100만~200만원에서 250만~300만원까지 값이 나가는 건 그 때문이다.
아버지는 기술의 명맥을 이어왔다면 그는 한걸음 더 나가 현대화·산업화를 목표로 한다. 시중에서 구하기 쉬운 일반 대나무로 만든 집성목을 활용, 편지칼부터 과일칼 부엌칼 주머니칼을 다량 생산할 계획이다.
작업실 앞 빈터를 공장부지로 확보해둔 상태. 언 땅이 풀리면 공사를 시작한다. 한씨는 "칼도 기계로 깎아 4만~5만원까지 가격을 인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동네사람 3명을 고용, 하반기부터 생산한다"고 말했다.
"외국에서 칼에 이름이나 생활신조 등 짧은 글을 새기기도 하지만 문학작품을 새긴 칼은 낙죽장도가 유일해요. 문(文)에 무(武)를 결합한 독특한 우리만의 문화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알았으면 합니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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